사면초가(四넉 사, 面 낯 면, 楚 모형 초, 歌 노래 가)
문자대로 직역하면,「사방(四方)에서 들리는 초(楚)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敵)에게 둘러싸인 상태(狀態)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孤立) 상태(狀態)에 빠짐을 이르는 말이다.
楚나라 패왕(覇王) 항우(項羽)와 漢나라 왕 유방(劉邦)이 천하(天下)를 다투던 때. 어느덧 항우의 전세가 기울어 그 쟁패전(爭覇戰)이 거의 결말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항우(項羽)에게도 그 마지막 운명(運命)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끼던 슬기로운 장수(將帥) 범증(范增)마저 떠나 버리니 형세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결국, 항우는 유방(劉邦)에게 눌려 漢나라와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楚나라 항우(項羽)를 제압한 유방(劉邦)은 천하를 이분(二分)하여 홍구(鴻溝)의 서쪽을 漢나라, 그리고 동쪽을 楚나라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한 결정에 따라 항우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유방도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유방에게 “이제야 말로 漢나라와 楚나라의 세력의 우열은 분명합니다.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항우를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방은 백마를 돌이켜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항우를 추격하기로 하였다. 漢나라의 명장(名將) 한신(韓信)은 齊나라로부터, 그리고 팽월(彭越)은 梁나라로부터, 그 밖의 장군들도 각각 군대를 이끌고 해하(垓下)로 달려와서 항우의 군대를 추격했다. 결국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한신(韓信) 장군에게 포위(包圍) 당(當)하고 말았다.
항우에겐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고, 날로 병졸(兵卒)은 줄어들며 군량미(軍糧米)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군(漢軍)과 제후(諸侯)의 군사(軍士)는 포위망(包圍網)을 점점 좁혀 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방(四方)에서 초(楚)나라의 노래가 들려왔다. 가뜩이나 고달픈 초(楚)나라 병사(兵士)로 하여금 고향(故鄕)을 그리게 하는 구슬픈 노래였다. 한(漢)나라가 항복(降伏ㆍ降服)한 초(楚)나라 병사(兵士)들로 하여금 고향(故鄕)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이일이 바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유래가 된 것이다. 항우(項羽)는 깜짝 놀라「한(漢)나라가 이미 초(楚)나라를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 초(楚)나라 사람이 저렇게 많은 것인고?」하고 탄식(歎息ㆍ嘆息)했다.
《史記》에는 항우의 그 마지막 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항우는 진중(陣中)에서 마지막 결별의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항우에게는 한 미인이 있어, 이름을 우미인(虞美人)이라고 하여, 항상 항우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한 준마가 있어, 이름을 추(鵻)라고 하였다.
항우는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다음과 같은 그 유명(有名)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시(詩)를 지어 자신(自身)의 운명(運命)을 탄식(歎息ㆍ嘆息)했다.
「나의 힘은 산을 빼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 때는 나에게 불리하여 추(鵻)가 가지 않으니, 추(鵻)가 가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가? 우미인아, 우미인아, 그대를 어찌할 것인가?」 이에 우미인도 그의 시(詩)에 화답(和答)하고는 자결(自決)하고 말았다.
항우(項羽)는 800기(騎)의 잔병(殘兵)을 이끌고 오강(烏江)까지 갔다가 결국(結局) 건너지 못하고 그 곳에서 자결(自決)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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