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성인(聖人)
조선의 제23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였던 순조 때에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소백산 기슭의 순흥골이라는 지역에 10,000석지기 황부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황부장의 이웃 고을에 대과거를 목표로 열심히 준비해오고 있던 최생(崔生)이라는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 어느덧 과거보는 날이 가까워져 이제 한양으로 상경하는 일을 앞두고 있었다.
한양을 향한 두 달여 동안의 수 천리 나그네 길에는 적잖은 노자가 필요한데 살림이 어려웠던 최생(崔生)은 노자를 구하고자 팔방으로 알아보았으나 너나나나 없이 궁하던 시절, 그 시골에서 도무지 구할 데가 없어 난항을 겪는데 불현듯 자신의 장인이 그 황부자의 친구라는 사실이 떠올라 즉시 장인을 찾아뵙고 황부자에게 빚을 좀 얻어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런데 장인 왈, “제 아비 어미 제사상에도 보리 세 됫박과 밴댕이 세 마리를 놓고 지내는 지독한 노랭이인데 빚을 내주겠는가? 하나마나 어림없는 얘길세”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생(崔生)은 달리 방법이 없는지라 황부자를 직접 찾아가서 친구 되는 장인의 사위되는 사람이라고 인사를 드리며 자신의 어려운 사정과 부탁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이 황부자가 선입견과는 다르게 최생(崔生)을 반겨 맞이하며 융숭하게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니, 황부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으며 지내다가 어찌어찌 안동의 어느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부인 워낙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하여 남들은 거들떠도 보지도 않는 길가의 돌무더기 묵정밭들을 손에 피가 맺히도록 개간하여 때를 따라 먹 거리가 될 만한 작물들을 부지런히 심고 수시로 김도 매고 소매를 퍼다 거름을 주는 등으로 눈만 뜨면 밭으로 가서 수족이 닳도록 정성껏 농사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 힘겨운 세월을 십 수 년을 보내면서 남들보다 덜 먹고 덜 입고 덜 쓰며 재산을 악착같이 모아갔다. 그런 노력으로 벼가 한 섬 두 섬, 보리가 석 섬 넉 섬이 늘어났고 그로인한 기쁨과 낙이 날로 커져가고 차츰 형편이 펴지고 편안해 지면서 살맛이 나게 되었고 그런 맛에 재산은 날로 불어나 만석지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만석지기가 되어 모든 것이 풍족하여 잘 먹고 잘 입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지만 돌밭이며 남들이 버린 묵정밭을 개간하며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무던히도 애쓰던 그 어렵던 때보다 지금은 재미도 덜하고 그에 따라 날로 사는 맛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서 모든 재산을 이제는 살맛나게 잘 쓰면서 살겠다고 삶의 방향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한 하인을 불러 최생(崔生)에게 곳간에 있는 돈 100량을 내어주고 말도 한 필 내줘서 한양 길에 사용하도록 하고, 과거 보러 갈 사람이이만큼 집안 걱정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 벼 50섬을 최생(崔生) 집에 갖다 주라고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황부자는 최생(崔生)과의 일을 계기로 하여 자신의 만석 재산을 과거를 준비하는 가난한 수 백 명의 서생(書生)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정작 자신의 두 아들에게는 밭 한 뙈기조차도 남겨주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나중에 최생(崔生)이 대성하여 경상감사가 되어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황부자를 찾아갔더니 무덤의 소재까지 없애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30년 전에 왕십리에서 산 적이 있는데 동네어귀에 ‘명일슈퍼마켙(실상은 조그마한 동네 구멍가게인데 그땐 전부 슈퍼마켓이라고 명명했었다^^)이라는 가게 하나가 있었다. 출퇴근 시에 그 앞을 지나게 되는데 그렇게 오고가는 길에 자주 목격하게 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80전후의 허리는 좀 굽으시고 키는 160cm 남짓하시며 상의는 주로 밤색 재건복을 입으신 행색이 남루해 보이던 분이셨다. 이 할아버지는 가게와 주택들에서 가게 앞의 길가에 내어놓은 박스며 과자봉지 등의 비닐류 등을 챙겨서 리어카에 실어가시는 것이었다. 모진 생활고를 겪고 계신 분이라는 선입견에 그런 모습을 뵐 때마다 시골에 계시던 우리 부모님 연대시라 안쓰러움이 앞서게 되던 분이셨다.
한 번은 무덥던 여름 어느 날, 땀까지 흘리시면서 박스들을 챙겨서 리어카에 싣는 모습에 마음이 안 되어 그 상점에서 우유를 하나 사서 드렸더니 감사하다며 벌컥벌컥 단숨에 다 드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헌데, 언제인가부터는 이 할아버지께서 보이지 않으신 것이다. 몹시 궁금해서 그 가게주인에게 물었더니,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 한 세상 오셨다가 고단한 삶만 겪으시고 돌아가셨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저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가게 주인의 말에 나는 깊은 감동과 충격에 한 동안 멍한 느낌으로 여러 생각들이 스치고 있었다.
세상에! 그 할아버지께서 그 힘겹게 모은 박스 등을 팔아서 마련한 돈들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지원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분 역시도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한 끼 한 끼를 그날그날 해결해야 했던 분이었다는 것이다.
기동력이 부족한 할아버지께서 박스를 모아본들 얼마나 모을 수 있었겠으며 그렇게 모은 박스를 팔아서 남에게 건넨 돈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자신도 궁핍한 상황에서 남들의 어려움을 위해 어렵게 모은 한 푼 두 푼은 그분으로서는 전 재산이 아니었겠는가.
이 시대의 성인(聖人)은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 황부자나 패지를 줍던 그 할아버지가 자신들의 피와 땀을 남을 위해 바친 이 시대의 진정한 성인이 아닌가 싶다. 그 이후로 필자는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람들이나 지역의 어려운 분들을 위해 비록 작은 물질이나마 내가 가진 것을 십시일반으로 나누어주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함께 울고 웃으며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던 황부자나 패지 할아버지의 숭고한 철학과 그 깊은 정에 대해 한 번 쯤 깊이 생각하며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루아침 나뭇잎에 맺힌 이슬같이 짧은 인생, 우리가 추구해야할 참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우리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아 살피고 돕는 일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참 가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