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

일편단심 善竹橋의 충절

애돌 2023. 7. 1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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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竹橋의 충절

선죽교는 고려시대 때 화강석으로 축조된 널다리로서 개성시 선죽동에 소재하고 있다.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길이는 8.35m, 너비는 3.36m 규모로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이다.

 

당초에는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되었다. 이 선죽교는 태조 왕건이 919(태조 1) 송도(지금의 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고려시대 때 석교(石橋)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이 선죽교는 1780(정조 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선죽교는 1392(조선 태조 즉위년) 정몽주가 후에 태종이 된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에게 피살된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는 선지교(善地橋)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은 통행을 제한하는 대신 행인을 위하여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하였다. 다리 옆에 비각 안에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가 서 있다. 또 선죽교 서쪽으로 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숭양서원(북한 국보 128)과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그러면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고려와 왕실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충절로 생을 마감했던 그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자.

때는 고려 공양왕 (恭讓王) 4, 왕세자 석()이 명나라를 다녀온다는 소식을 들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국가의 원훈으로서 황주(黃州)까지 마중을 나갔다.

다음 날이면 왕세자 일행과 황주에서 서로 만나는 날이니 하루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지라, 이성계와 그의 일행은 오랜만에 장부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풀고자 호랑이가 많기로 소문난 해주의 봉산으로 사냥을 나섰다.

백발백중 명군(名弓) 중의 명궁 이성계가 활시위를 당김에 따라 나르는 꿩, 뛰는 멧돼지며 노루 등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가 이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성계는 그렇게 이리저리 말을 달려 사냥을 하다가 어느 순간 그만 쓰러진 고목(古木)에 말발굽이 걸려 바위 아래로 떨어져 크게 다치고 말았다. 부하들이 황급히 이성계를 황주로 옮겨 치료에 들어갔다.

 이성계가 낙마로 크게 다쳐서 몸져 누워있다는 소식은, 곧바로 서울 송도에 퍼져나갔고, 이에 따라 이성계 일파들의 걱정은 태산과 같게 되었다. 정적끼리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칼날 같은 어지러운 시국에 하루의 호연지기를 풀기 위한 사냥이 이리도 큰 화근으로 다가올 줄이야.

이성계의 낙마에 놀란 의형제 이지란과 남은, 정도전 등이 계속 혼수상태로 중태에 빠져 있는 이성계를 노심초사 지켜보며 빨리 쾌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이성계와 각을 세우고 있던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정몽주는 9공신의 한 사람으로 친명파의 거두이며 대학자로서, 덕망이 일세를 뒤덮은 사람이었다. 전날 권신들이 별호하며 정권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것이 비위에 거슬렸다. 우왕 때부터 권세를 잡았던 이인임, 최영이 없어지자, 악순환은 계속되고 이성계의 공적은 날로 왕성해져서 사람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렸다. 결국은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여 정권을 농락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정도전 같은 학문의 길을 닦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이성계에게 동조하여 새 세상을 꿈꾸고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것이 모두 정몽주의 마음에 맞지 않았고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득이 이성계를 제거하기로 작심을 하고 있던 차였다.

 

이성계는 다행히 날이 가면서 상태가 호전되어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상태와 상황 어떠한지 알아야할 필요도 있었고 그래도 사적으로는 친구로서 오랜 친분 관계도 있고 해서 이성계의 사저로 문병을 갔다. 이성계의 5째 아들인 이방원은 조영규와 함께 자리에 누워있는 이성계 곁을 항상 지키고 있었다.

조영규는 정3품 판위위시사 (고려군의 의장대 에서 사용하는 물건과 기구를 관리하는 위시시의 책임자)인 고위관리였는데 보잘 것 없는 집 안에서 태어나 이성계를 만나면서 고려의 장수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하는 심복이 된 것이다.

그런 조영규가 이성계가 다쳐서 누워있는 상황이 염려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영규는정몽주 대감의 병문안은 겉으로의 명분이지 그 속셈은 다른 데 있을 겁니다. 그러니 조심하셔야 하옵니다.라고 이성계에게 간언((諫言)을 하였다.

그러자 이성계는어허, 무슨 소리인고! 정령 나와 정몽주 대감이 오랜 친구사이란 걸 몰라서 하는 소리인 것이야? 당치 않은 소리, 두 번 다시 하지 말라!

그러자 이방원이 답답한 듯 이성계의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침상에 짚으며,아닙니다. 아버님, 우리가 무고한 모함을 받게 되면 정몽주는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를 변명해주겠지만, 만약 나라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는 사람이옵니다.라며 조영규의 진언을 거든다.

 

정몽주가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이방원이 이리 오셨으니 술이나 한 잔 권하여 드리고 싶다며 별도의 자리로 정몽주를 청하자 이성계측의 생각들을 가늠해보기도 할 겸 방원의 청에 응하여 술상을 놓고 서로 대좌하게 되었는데, 어지러운 시국에 정적이 된 상태이니 두 사람 간에 속내는 편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이방원은 얼굴에 미소를 담고 정중한 자세로 술 한 잔을 권하며 말을 건넨다.

포은 선생님, 제 술 한 잔 받으시고 성리학의 대가이시니 성리학에 대한 좋은 말씀이나 해주십시오.이에 정몽주는성리학은 심심의 수양이 으뜸이지.라는 뼈있는 말로 시작했고 그렇게 서로 학문에 대해 몇 마디 주거니 받거니 했으나, 서로가 뜻하는 대화가 아니어서인지 쉬이 끝나고 이내 고려조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진전되고 있었다.

이방원은 포은의 마음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해,하여가시조 한 수를 즉흥적으로 유려하게 뽑아내려갔다.

 

此亦何如 (차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리

彼亦何如 (피역하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 (성황당후원)   성황당 뒷담이

頹落亦何如 (퇴락역하여)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 (아배약차위)   우리도 이같이 하여

不死亦何如 (불사역하여)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

이방원의 이하여가는 다 썩어져 가는 고려 왕실만 붙드려고 하지 마시고, 더불어서 좋은 세상 만들어가는 것이 어떠한지를 묻는 시조였다.

解說)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시조는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백년을 살고지고.인데, 한시에서는 위에서 보듯이 좀 다르다.
우리가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라고 배운 구절이 한자 원시에는 성황당 뒷담이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라고 표현 되어있는데, 조선 후기 때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표현이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는, 그래서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지 싶다. 성황당은 나라와 조정을 의미하는 사직(社稷)을 은유한 표현이다. 따라서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다는 것은 한 왕조가 망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다.

20대의 이방원의 시조에 50대의 정몽주가 역시나 시조 한 수로 화답을 한다. 바로 이 시조가 후세에 널리 회자된 그 유명한단심가(丹心歌)이다.

此身死了死了 (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갱사료)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백골이 진토되어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 (향주일편단심)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寧有改理也歟 (영유개리여지)    어찌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은 정몽주의 일편단심이 변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제거해야 된다는 신념이 들었고, 이성계에 대한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심복 조영규로 하여금 살해토록 한 것이다. 정몽주가 조영규의 철편에 맞아 선죽교에서 쓰러진 날이 4자가 3개나 있던 공양왕 444일로서 싱그러움이 넘치던 초여름이었다. 그의 나이 66, 이성계보다 한 살 아래의 나이였다.

 

이로써 공양왕을 지키려던 거목 정몽주가 살해됨으로써 공양왕의 전도는 더욱 암담해졌고, 이를 감지한 공양왕은 이방원과 조용을 궁으로 불러들여 이성계와 동맹을 맺고 싶다는 뜻을 이성계에게 전하라며 상호 동맹서를 준비하고 동맹일자를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공양왕은 정몽주가 살해된 지 3개월여가 지난 712일에, 미리 작성한 맹서(盟書誓)를 가지고 이성계의 사저로 행차를 하려고 별궁에서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맹을 맺는 일이라는 것이 나라와 나라 간에 맺는 일인진대 임금과 신하가 동맹을 맺는다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공양왕이 목숨을 구걸하는 구차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행차를 하려고 공양왕이 별궁에 대기 중인 그때에 우시중 배극렴이 일이 진행되도록 보고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인지라, 급히 왕대비전으로 들어가, 왕의 판단력이 혼미하여 이미 임금의 도리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이니 조정과 나라를 위해 폐위함이 옳겠다고 진언하자 왕대비도 그간 임금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더 이상 보고 둘 수만은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던 터이라, 즉시 조서를 작성하여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남은과 대호군(大護軍) 정희계로 하여금 작성한 조서를 들고, 행차를 기다리고 있던 별궁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는 왕의 그간의 여러 형태의 죄들을 논죄하며, 우부대언 한상경(韓尙敬)으로 하여금 교서를 읽게 하였다. 그렇게 폐위된 왕은 눈물을 흘리며 원주로 쫓겨났으니, 이로써 고려는 475(918~1392)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