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

황표정사 [黃標政事]

애돌 2023. 7. 1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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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의 맏아들이었으며 조선조 제5대 왕(재위 14501452)이었던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병으로 승하하자 나라의 임금 자리를 한시도 비워둘 수 없는 탓에, 문종 25월,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문종의 아들인 12세의 어린 단종(재위 14521455)을 제6대 왕으로 옥좌에 올리는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단종이 아무리 총명하다할 지라도 그 복잡다단한 국사를 친히 결재하고, 정치상의 온갖 중요한 정무들을 친히 수행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어머니,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안 계셔서 수렴청정(垂簾聽政)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임금이니 임금노릇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수많은 관리들을 나라와 조정의 상황에 따라 수시로 적재적소에 이동 임명도 하고 또한 새로운 관리들도 임명을 해야 하는데 누가 누군지를 알 수가 없는 어린 임금으로서는 정무를 온전하게 수행할 수가 없었다. 해서, 조정에서는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본의 세 정승이 논의하여 지목한 대상자의 이름 위에 노란표시를 해서 친재를 올리면 임금 단종은 자신의 의사가 전혀 개입되지도 않은 그대로 재결을 하였다. 이것을 바로 '황표정사'라 별명하였던 것이다.

 

 임금의 의사와 권한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신하들이 하고 있는 셈이니 장차 단종의 입지가 위태로움으로 향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단면이다.

 

그런데 이 황표정사가 날이 갈수록 세 정승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고, 임금의 상당 부분의 권한과 권력을 실질적으로 대행하게 되면서 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휘두르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조정의 정사가 이렇게 세 정승의 손아귀에서 휘둘리게 되다보니 이를 지켜보던 종친들의 불만이 불거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특히 종친 가운데서도 임금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가운데 분경(奔競: 분주히 경쟁하여 전조(銓曹)의 대신이나 권문세가에 드나들면서 獵官運動 즉 승진과 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으로 노력한다는 뜻)을 금한다는 영이 내리자 가뜩이나 야심을 키우며 불만을 품고 있던 수양대군은,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를 만나서,

조정의 당상관 이상과 대군의 집에 출입하며 분경을 하는 자들은 법으로서 다스린다는 분경금지령이 아무리 성상의 재결을 받은 국법이라 하지만, 대군의 집까지 분경을 금한다는 것은 우리 왕실 종친의 발목을 묶어 집안에 가두자는 것이니, 이는 조정에서 우리 대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보령이 어리신 금상이 정사를 직접 볼 수가 없다는 명분을 앞세워 정승들께서 금상을 에워싸고 왕실의 우익을 제거하려는 그 속셈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라고 세 정승을 호되게 힐책하였다.

 

 성난 사자와 같은 같은 기세로 무섭게 덤벼드는 수양대군의 위세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영의정이라는 황보인도, 북방의 46진 중 6진의 개척을 총지휘하고 두만강 이남을 완전히 조선의 영토로 만드는 데 큰 공훈을 세워 "큰 호랑이(大虎)"라고 불릴만큼 포스가 대단했던 김종서도 짐짓 놀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거센 항의에 주눅이 들어 임기응변의 변명으로 아래와 같이 수양대군을 진정시키며 이해를 구했다.

대감, 우리는 잘 모르는 일이었소. 아마 사헌부에서 그리 정한 듯하니, 진상을 알아보아 대군들께만은 그 법을 해제토록 조치하리니 그만 오해를 풀도록 하시오

 

이렇게 하여 분경 금지령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수양대군의 위세만 한 층 높아졌다. 그러한 수양대군의  위세가 결국에는 단종을 제치고 임금 자리에 올라서는 비극의 서막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러면 이 말은 후세에 지칭한 말인가? 아니다. 그 당시 조정에서 엄연히 쓰였던 말이다. 단종 즉위 72일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단종실록권 제2, 1장 뒤쪽에 실린 그 증거의 기록을 보자.

是政 議政府堂上 每日詣賓廳 吏兵曹堂上就議 所除臺省政曹 沿邊將帥及守令 必書三人姓名 取其中可用者一人 付黃標以啓 魯山 但以筆點之而已 時人謂之 黃標政事

이번 정사에서 의정부 당상들이 매일 빈청에 나아가고, 이조병조의 당상이 의논에 참여하여, 제수하는 대성정조연변 고을의 장수와 수령은 반드시 3인의 성명을 썼으나, 그중에 쓸 만 한 자 1인을 취하여 황표를 붙여서 아뢰면 노산군이 다만 붓으로 낙점할 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황표정사라고 일컬었다